view all 카테고리에 11개의 글이 있습니다. / 在 view all 类别里面 有11个文章.
  1. [2008.09.21] 황당...
  2. [2008.08.15] 중국에서의 일상 + 중국수도공항 신청사
  3. [2008.07.24] 开封 여행기 종합 3
  4. [2008.07.22] Steve Jobs
  5. [2008.07.10] 开封 기차 여행 중... 세번째
  6. [2008.07.03] 开封 기차 여행 중... 두번째 3
  7. [2008.06.29] 开封 기차 여행 중... 첫번째
  8. [2008.06.23] ^-^ ^-^ 1
  9. [2008.06.23] Qiangxia^-^ ^-^ 1
  10. [2008.06.21] 上海 外滩/东方明珠
황당...
category : blog  date : 2008. 9. 21. 14:35
Posted by SangJin

황당한 문제가 발생했다.
본 블로그는 멀리 있는 여자친구와
여자친구의 가족 및 친구들과의 교류를 위해 만든 팀블로그로
일종의 일기장 같은 성격의 블로그였다.

그런데 작년부터 중국정부가
조금씩 구글 및 유명 한국사이트로의 접근을 차단하기 시작하더니
얼마전엔 결국 다음/티스토리 블로그 접근을 완전 차단해버렸다.
현재 중국에서는 티스토리의 모든 블로그로 접근할 수 없다.
이 블로그의 존재 이유가 사라져버린것이다.
애써 디자인하고 코딩한 웹페이지 모두가 무용지물이 되버렸다.

Textcube 로 이동한다.
http://ahnqianglove.textcube.com



# 덧붙힘
정보와 지식은 곧 힘이며,
정보와 지식의 흐름이 단속 또는 관리 가능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그 어떤 조직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조직은 그 힘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정보나 지식은 어떤 권력이나 무형의 힘으로
통제 및 제어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만약 통제가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더이상 인간의 사회가 아니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기가 그 사회의 구성원임을 모르거나
또는 구성원이길 포기한 것이다.
인류 공동의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중국에서의 일상 + 중국수도공항 신청사
category : photo/china  date : 2008. 8. 15. 02:25
Posted by SangJin
# 중국에서의 일상
붙혀놓고 보니 좀 지저분하군...
내 인생에서 그리 많지않았던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 중 하나.
존재의 이유를 알게해준 시간들,,, 그 곳이 중국이었다니,,,


# 중국수도공항 신청사
여기 저기 공항을 많이 다녀봤지만
가슴이 아득해지게 만드는 공항은 없었다. 여기 중국수도공항만 빼고...

처음 인천공항을 보고서 감탄했던게 겨우 몇 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건 말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진정 인간이 지은 건물인가 싶고 경외심마저 느끼게 한다.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이 처음 거치게될 이곳에서 처음 느끼될 감정은 아마도 이 경외심이 될 것이다.
다시말해 그것까지 염두해두고 지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 건물의 건축목적 중 하나란 뜻도 된다.

감탄과 경외심이 가라앉고, 자금성을 처음 봤을때와 비슷한 질문이 떠오른다.
"누굴 위한 건축물인가? 나란 존재가 가소로워 보이는군."

중국의 규모의 문화를 보면 항상 멋있고 웅장하단 느낌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이상의 것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웅장한 건축물을 지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은 안느껴지고
건축물에 비해 인간이 한없이 작아보이며 오히려 내가 예속되는 것만같다.
보이는 것엔 적응이 되도, 뭔지 이 동떨어진 듯한 기분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공항건물 하나 가지고 너무 깊게 들어가나?
우리가 생각하는 감동과 중국인이 생각하는 감동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저기엔 웅장한 건축물만 있고 인간이 없었다.

이른 아침 초췌한 모습의 두 남녀... 잠깐의 이별.
날씨는 무척 쌀쌀했고 난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날 강하는 웃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로 한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는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버스로 이동가능한 시간이고,
어떤 이에게는 출근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린 가까이에 있다.
开封 여행기 종합
category : photo/china  date : 2008. 7. 24. 16:25
Posted by SangJin


开封 여행기 종합.
볼건 많았는데 역시나 공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중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의례 느끼는거지만, 목이 턱하니 막히는 탁한 공기, 꼭 사서 마셔야하는 물, 먹을 때와 뭔가를 살 때 한참을 고민하게 만드는 음식들과 각종 물건들,,,
이런 것들만 빼면 참 순수하고 절제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공기나 먹는 물, 가짜 음식/물건들, 주변 시설들만 좀 어떻게 정리되면 오래 눌러 살아도 괜찮을 듯 싶다.
근데 사람사는데 저런 것들 빼면 또 뭐가 있을까?
사람들이 좋다는 뜻이다. 저들은 적어도 우리들 보다는 순수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 개봉(開封, 开封, 카이펑)

서안(西安), 낙양(洛陽), 개봉(開封) 을 중국 3대 고도(古都) 라고 하며, 이 중에서 개봉은 전국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오대의 양(梁), 북송(北宋), 금(金) 등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로 중국 6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다. 북송시대에는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였고 강남의 여러 도시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 "천하의 요회(要會)"라 불렀다. 볼 곳으로는 1,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상국사(相國寺), 송(宋)대의 건축을 복원해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송도어가(宋都御街), 송대 황거(皇居)의 어원(御園) 일부였던 용정공원(龍亭公園), 북송시대에 창건된 높이가 55.08m이며 8각형 모양의 13층인 철탑(鐵塔) 등이 있다.
Steve Jobs
category : blog  date : 2008. 7. 22. 21:41
Posted by Sa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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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이 글은 애플컴퓨터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CEO인 스티브 잡스가 2005년 6월 12일 한 학위수여식 축사이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세계 최고 대학 중 한 곳의 학위수여식에 참석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지금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근접해본 것입니다. 오늘 저는 내 인생의 세가지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대단한건 아니고 그저 세 가지 얘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번째 이야기는 점을 잇는 것에 관한 겁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나는 리드 대학을 첫 6개월 다닌 후 그만뒀습니다. 그러나 또 18개월간인가 대학 안에서 두리번거린 뒤에야 진짜로 그만뒀습니다. 내가 왜 그만뒀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건 내가 태어나기전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모는 어리고 미혼이었던 대학졸업생이었고, 그녀는 날 입양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난 태어나자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변호사 부부는 마지막 순간에 진정 딸을 원한다며 마음을 바꿨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그래서 대기순번에 있던 나의 부모는 한밤중에 전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원치않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이를 입양하시겠어요?" 양부모님은 "물론이죠"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나의 생모는 나의 양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양부는 고교도 나오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생모는 그래서 입양서류에 사인하길 거부했습니다. 몇 개월 뒤 그녀는 나의 양부모로부터 언젠간 나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마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그리고 17년 후 나는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 학비가 많은 대학을 골랐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였던 나의 양부모의 저축은 내 학비로 다 지출되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뒤 나는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찾는 데 어떤 도움이 되어줄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거기서 내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써버리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그래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고 그래도 괜찮을 거라 믿었습니다. 당시엔 많이 무서웠죠.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건 내가 평생 했던 결정 가운데 최고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두자 나는 흥미없는 필수과목을 듣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리고 재미있어 보이는 과목들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모든게 낭만적이진 않았습니다. 나는 기숙사에 방이 없어서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잤고, 콜라병을 5센터에 되팔아 음식을 사먹었으며, 매주 일요일밤 헤어 크리샤 사원에서 주는 좋은 음식을 먹기위해 마을을 건너 11km를 걸어갔습니다. 그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가다 부딪힌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당시 리드 대학은 미국에서 아마도 가장 뛰어난 서예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캠퍼스 내의 모든 포스터와 서랍에 붙은 레이블은 손으로 서예로 쓰여진 아름다운 글자들이었습니다. 학교를 관두고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서예를 배우고자 서예 과목을 듣기로 했습니다. 나는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 서로 다른 활자체들간의 공간을 다양화하는 방법, 무엇이 훌륭한 서체를 만드는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건 과학이 알아채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신비로움이었고 나는 그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이것들 중 그 무엇도 내 인생에 있어 실제적 적용이란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 매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 모두 내게 다시 되살아 났고, 우리는 맥 안에 그 모든 것을 디자인해 넣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첫번째 컴퓨터입니다.
만약 내가 그 대학의 전공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맥은 결코 다중 서체나 균형잡인 폰트를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그저 맥을 베꼈기 때문에, 어쩌면 PC도 그런 서체를 가지지 못했을 듯합니다. 만약 내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서예 과목을 듣지 않았을 것이고, PC도 그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내가 대학생일 때 앞을 내다보며 이런 점들을 이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되돌아보면 아주아주 뚜렷하게 점들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러분들은 미래를 내다보며 점들을 이을 수 없습니다. 단지 뒤를 보며 점들을 이을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점들이 미래엔 어떤 식으로든 이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뭔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業), 뭐든지 말이죠. 이런 사고방식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변화시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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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나는 운좋게도 인생에서 내가 사랑할 것들을 일찍 찾았습니다. 나는 스무살 때 아버지의 차고에서 워즈와 함께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우린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 애플은 차고 속 단 두명에서 20억 매출을 올리는 직원 4000명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 전해에 우리는 매킨토시라는 훌륭한 제품을 내놓았고 나는 막 서른살이 됐습니다. 그리고 나는 해고됐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될 수 있지요? 글쎄요, 애플이 커가면서 우리는 내가 생각하기에 회사 경영에 재능이 있어보이는 나와 함께할 어떤 사람을 고용했고, 그 첫해에는 모든 게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갈라섰습니다. 우리가 갈라섰을 때 우리 이사회는 그 사람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른살에 쫓겨났습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쫓겨났죠. 내 성인으로서의 인생의 촛점 모두가 사라졌고, 그건 망연자실한 일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 정말 뭘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내가 이전 기업인 세대들을 물러나게 했고 내게 넘어오던 바톤을 떨어뜨려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데이빗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이렇게 상황을 나쁘게 만든데 대해 사과하고자 했습니다. 나의 실패는 매우 공개적인 것이어서, 실리콘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뭔가가 천천히 날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난 여전히 내가 했던 것들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일은 그걸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나는 쫓겨났지만 여전히 그 일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땐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것은 지금껏 내게 일어난 일 중에서 최고의 일이었습니다. 성공해야한다는 무거움은 다시 시작한다는 가벼움으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확신도 적었죠. 그것은 나를 내 인생 최고의 창조적인 시기로 던져놓았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다음 5년간, 나는 넥스트라는 회사와 픽사라는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된 놀라운 여인과 사랑에 빠졌죠.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이런 굉장한 일들 속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했고, 나는 애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현재 애플이 누리고 있는 르네상스의 심장이 됐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나는 정말 행복한 가족이 됐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나는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건 쓰디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겐 필요했던 거라 생각합니다.  때로 인생은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때립니다. 믿음을 잃지 마세요. 나를 전진시킨 유일한 힘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연인에게 그러하듯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여러분의 일은 여러분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당신이 만족할 유일한 길은 당신이 위대한 일이라 믿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해내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런 일을 못찾았다면, 계속 찾으세요. 안주하지 마세요. 그것을 찾았을 때 당신의 심장이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위대한 관계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좋아집니다. 그러니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세요. 안주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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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겁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열일곱살 때, 나는 이런 인용문을 읽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의 인생이 분명히 옳은 삶이 될 것이다." 내게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 후로 지난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내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하고 싶을까?" 수많은 나날을 계속해 "아니오"란 대답을 해올때마다, 나는 뭔가 바꿀 필요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인생에 있어 큰 결정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내가 본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부의 기대들, 모든 자부심, 모든 창피함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은 죽음 앞에선 사라져버리고 단지 진정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죽게된다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덫을 피하는 제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발가벗었습니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 전쯤 나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는 오전 7시30분에 스캔을 받았고 췌장에 종양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나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내게 불치의 암이 거의 확실하다며 3개월에서 6개월을 못넘길거라고 말했습니다. 내 주치의는 집에 가서 내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고 그건 죽을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은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간 말해줘야 할 것을 몇 달 동안 다 말해야 한다는 것이죠. 가족들이 가능한 어렵지 않도록 잘 마무리하란 뜻입니다. 작별인사를 하란 말입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그날 나는 그 진단과 하루종일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게 조직검사를 했고 의사들은 내 목으로 내시경을 넣어 위와 내장을 거쳐 췌장에 바늘을 꽂고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냈습니다. 나는 침착했으나 같이 있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검사하고는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난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십년간도 그것이 유일한 경험이길 바랍니다.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이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 더 확실하게 여러분께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누구도 죽길 원치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조차 그곳에 가려고 죽고 싶어하지는 않지요. 게다가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맞을 목적지입니다. 누구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면 죽음이란 삶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을 바꾸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낡은 것을 치워줍니다. 지금 이 시각, 새로움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미래 언젠가, 여러분들도 점차 늙을 것이고 치워지게 될 것입니다. 연극 같은 얘기여서 미안하지만, 확실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의 시간은 제한되있습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사느라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대로 사는 도그마에 갇히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여러분 내부의 목소리를 잠식하도록 하지 마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그것들은 여러분이 진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내가 어렸을 때 지구 카탈로그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내 세대에게는 성경과도 같은 책이었죠. 그 책을 쓴 사람은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 팍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인데, 시적인 감성으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이라 PC도 데스트탑 퍼블리싱도 없어 모두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어졌습니다. 페이퍼백으로 만든 구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에 나온 것입니다. 그 책은 이상적이었고, 훌륭한 도구들과 굉장한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지구 카탈로그를 여러 판에 걸쳐 내놓았고, 모든 것이 완성됐을 때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게 1970년대 중반이고, 난 여러분들 나이였습니다. 그 책 최종판 뒷표지에는 여러분들이 모험을 좋아한다면 히치하이킹을 할 때 발견하곤 하는 이른 아침 시골길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 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고파 하라. 어리석어 하라."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배고파하라. 어리석어 하라. 그리고 나는 항상 내 자신에게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소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파 하라. 어리석어 하라.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나는 평생을 거쳐 영웅을 찾아다녔다.
진정 내가 닮고 싶고 내 인생의 모티브로 삼고싶은 영웅을 정말로 간절히 찾아왔다.
내 영혼의 주인될 영웅, 내 인생을 저당잡힐 가치가 있는 영웅.
하지만 영웅인척 하는 인간들만 널리고 널렸었다.
만들어진 영웅들, 무의식적으로 머리속에 심어진 영웅들.
청소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면서 나는 그들의 영웅성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이 영웅이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남들의 영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영웅은 아니었다.

심지어 손가락 하나 까닥 하고 영웅이란 소리를 듣는 내가 한때 영웅이라 생각했던 그 인간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나는 영웅 찾기를 포기했고 내 방식대로 삶을 살았다.
난 영웅이 될 재목이 못되었기에 내 방식대로 산 내 인생은 말그대로 바람과 파도였다.
어려서 사회화 교육 과정에서 역할모델을 찾지 못한 유아기 시절 교육의 문제일까.

한계에 다다른 난 다시 영웅을 찾아헤맸고 30대 초반에서야 영웅을 찾았다.
바로 당신. 난 당신을 존경한다.
开封 기차 여행 중... 세번째
category : photo/china  date : 2008. 7. 10. 17:04
Posted by SangJin
저게 뭘까,,, 맞다 포청천이다.
하루에 두번씩 관광객들을 위해 판관 포청천 공연을 한다.
포청천을 저런데서 보다니...

자금성을 먼저 가봐서 그런지
기차여행이라는 점만 빼면,,, 그 절이 그 절이고 그 동네가 그 동네 같다.
어딜가나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종류의 절들만 잔뜩 있는...



카이펑시 거리와 뒷골목 풍경이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나 뒷골목은 다들 비슷비슷한 듯.
소수민족의 언어를 쓰는 부부로 보이는 왠지 주눅들어 보이는 두 남녀가 빵을 구워서 팔고 있다.
사서먹기엔 썩 내키지 않았는데,,, 먹어보니 맛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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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강하~
뒷모습이 꼭,,,, 인형같은,,,


여행 마지막날,,, 밤기차 안에서 조는 강하~ ㅎㅎㅎ
좀 안되보인다.
开封 기차 여행 중... 두번째
category : photo/china  date : 2008. 7. 3. 14:28
Posted by Sa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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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내가 저기 위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누구의 의지도 아니었고 내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나 답지 않았는데 낮술을 했나...

아무튼 실로 엄청나게 추웠었다.



언제 봐도 인형같어.
카메라 앞에만 서면 경직되는 인형. 하하하하하.
언제나 어린이 만화 여주인공 같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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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
인간이 하찮아 보일 정도로...
시설은 깔끔했고 모두 근래에 복원된 듯 옛느낌은 거의 없었다.
황제가 요양을 하던 곳이었다는데 이름은 까먹음.
开封 기차 여행 중... 첫번째
category : photo/china  date : 2008. 6. 29. 15:07
Posted by Sa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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开封(카이펑) 기차 여행 중...
베이징에서 카이펑까지 밤열차로 12시간을 갔는데,
12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어도
지도에서 보면 베이징과 카이펑이 그다지 멀어보이지 않는다.

외경이 그 무슨 시베리아 대륙횡단 어쩌고 하는,,, 그런 분위기.
나름 그럴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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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밖 풍경과 침대열차 내부...
베이징에서 카이펑까지 자그마치 12시간을 좁은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아야될 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선택한 침대열차이긴 했는데 저 침대들 잘보면 3층으로 되있고,
윗층으로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한다.
생각보다 상당히 높고 침대는 한사람이 누우면 남는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좁으며,
더군다나 침대들을 지탱해주는 저 약해 보이는 구조물들은 거의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여친은 1층 자리였는데 어떻게 마침 내 자리가 3층이란 말인지...

정말 올라가기 싫었다.
설사 올라간다해도 몸을 겨우 돌릴 정도로 좁은 공간의 곧 무너질 듯 보이는 침대에서
12시간을 누워있어야한다.
한번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고 또 다시 올라가는 과정들이 계속 머리속에서 리사이클했다.
할 수 없이 여친과 1층 침대를 같이 썼는데...
옆 침대에서 어떤 아줌마는 내복 차림으로 꺼리낌 없이 옷을 갈아입고,
또 배설물과 여자들 생리대가 범벅이된 소름끼치게 더러운 화장실...
참 복잡한 경험이었다.
^-^ ^-^
category : blog  date : 2008. 6. 23. 14:5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Qiangxia^-^  ^-^ 왔어요!

한시간 전에 드라마를 봤어요.
그 드라마 이름이 : 너는 내 운명.
전 한국 드라마를 아주 좋아해요. 그런데 중국어 subtitle이 없어서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하하하하하하

Qiangxia^-^ ^-^
category : blog  date : 2008. 6. 23. 14:5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终于加入了,成为team blog的一员了^-^  ^-^

上海 外滩/东方明珠
category : photo/china  date : 2008. 6. 21. 13:28
Posted by SangJin
上海 外滩/南京路 상해 와이탄/난징루
그리고 반가웠던 삼성간판.


과연 국제 도시 상해